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파르 왕조 (문단 편집) == 쇠퇴와 멸망(10세기) == 그러나 이러한 면모에도 불구하고 사파르 왕조는 근본적으로 야쿠브 이븐 라이스 개인의 전투 능력과 카리스마에 전적으로 기대어 세워진 국가였고, 내부적으로 수많은 허점을 떠안고 있었다. 이란 고원을 장악하면서 아바스 조와 빚어진 마찰 상황에서 이를 정당화할 명분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했으며[* 요컨대 훗날의 [[12이맘파]] 제국인 [[사파비 왕조]] 이란처럼 [[쉬아파]]를 기반으로 한 이란 민족성 구축과 같은 것이다.] 바반드나 [[카렌]], [[사만 왕조]]와 같은 구 페르시안 명문가[* 카렌, 사만 등은 파르티안계였다.]들과는 달리 완전히 평민 출신[* 말이 평민 출신이지 할아버지 대에 그의 집안은 난민이었으며, 난리를 피해 이주한 뒤 아버지와 그가 구리 세공인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겨우 가난을 벗어났다.]이 건립한 국가였기에 지역을 지배할 혈통적 정당성을 주장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이를 정당화할 사상적 토대도 없었기 때문에 억지로 산하에 끌어넣은 토후들은 하나같이 사파르 왕조의 지배에 의문을 표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야쿠브는 [[메소포타미아]]로 쳐들어갔으나 아바스 조 [[칼리파]] [[알 무타미드]]의 군대에게 '''다이르 알 아쿨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그 성장에 큰 제동이 걸렸으며, 얼마 안가 야쿠브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해버렸다. 동생인 '''아므르 이븐 라이스'''가 뒤를 이었으나 내부적인 동요가 심각했고 이를 억제할 겸, 자신들의 후방에 도사리고 있었던 사만 왕조를 굴복시키고자 대군을 일으켜 [[트란스옥시아나]]로 진격했으나 '''발흐 전투'''에서 사만 조의 시조인 이스마일 1세에게 참패하면서(901년) 완전히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이후 호라산을 비롯한 이란 고원의 대부분을 사만 조에게 빼앗기고, 파키스탄에 이르던 [[힌두쿠시]]쪽 영지는 완전히 상실해버렸으며 그 영역은 [[시스탄]],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쪼그라들었다. 뒤이어 이란 고원에서 패권을 확립한 쉬아파 [[부와이 왕조]]의 공격으로 더더욱 쇠락했다. 1002년경에 사만 왕조가 쇠퇴하면서 그 틈을 타 흥기했던 튀르크계 [[가즈나 왕조]]가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침입하면서 연전연패를 당한 사파르 왕조는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상실하고, 왕조의 본거지인 시스탄 지역까지 군세를 이끌고 진격한 [[마흐무드 가즈나비드]]에 의해 마지막 군주인 '''[[칼라프 1세]]'''가 붙잡혀 폐위당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